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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밴 에비에이터는 왜 조종사 장비에서 시작됐을까

2026.11.07
레이밴 에비에이터는 왜 조종사 장비에서 시작됐을까

오래된 영화나 사진에서 눈물방울 모양의 금속테 선글라스를 보면 ‘조종사 안경’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금은 활주로보다 거리에서 더 자주 보이는데, 이 모양에는 왜 아직도 조종사라는 이름이 따라다닐까요?

레이밴(Ray-Ban)을 만든 바슈롬(Bausch & Lomb)의 기록이 그 시작을 군 조종사용 고글로 적고 있고, 1930년대 광고도 조종사를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잘 알려진 이야기보다 조금 더 복잡한 그림이 나옵니다. 이번 글은 제품 소개가 아니라, 회사 연표와 박물관, 지역 역사 자료를 따라가며 이 이름의 시작을 살펴보는 역사 산책입니다.

하늘의 눈부심은 왜 문제가 됐을까

땅 위에서는 건물과 나무가 그늘을 만들지만, 구름 위의 조종석에서는 해를 가려 줄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영국 공군 항공의학연구소의 D. H. Brennan은 1989년 학술지 Health Physics에 실은 글의 초록에서, 직접 들어오는 눈부심과 시야를 뿌옇게 덮는 눈부심을 비행 중 시각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빠른 항공기를 조종하려면 눈으로 얻은 정보로 재빨리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보다 훨씬 뒤의 글이지만, 조종사에게 눈부심이 왜 가벼운 문제가 아닌지는 잘 보여 줍니다. 조종사의 눈에 얽힌 다른 이야기는 전투기 조종사와 콘택트렌즈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연표에 적힌 단어는 고글이었다

바슈롬의 공식 연표 1936년 항목에는 군 조종사용 Ray-Ban 고글이 처음 생산됐다는 짧은 문장이 있습니다. 185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작은 안경점에서 출발한 회사의 긴 연표 가운데 한 줄입니다.

눈에 띄는 단어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고글입니다. 스미스소니언 도서관이 정리한 바슈롬 상품 카탈로그 목록에도 ‘Ray-Ban Anti-Glare Sun Goggles’라는 광고 견본이 보입니다. 이름 그대로 눈부심을 막는 햇빛용 고글입니다. 오늘날의 패션 소품보다는 장비에 가까운 말입니다.

다만 이 목록은 긴 기간의 자료를 한데 묶은 것이어서, 어느 해의 이름인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첫 제품의 공식 명칭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가죽 비행모와 장갑 위에 놓인 눈물방울 모양의 선글라스
가죽 비행모와 장갑 위에 놓인 눈물방울 모양의 선글라스 · AI 생성 이미지

‘조종사를 위해 개발됐다’는 광고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역사박물관에는 ‘Ray-Ban Sunlenses’라는 이름의 소장품 기록이 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바슈롬은 1936년에 Ray-Ban 고급 선글라스와 안경을 내놓았고, 광고는 이 제품이 ‘광학적으로 정확하다(optically correct)’고, ‘육군과 해군 조종사를 위해 개발됐다(developed for Army and Navy aviators)’고 내세웠습니다. 근거로는 1938년 5월 1일 자 The Spur 62호 4쪽의 바슈롬 광고를 듭니다.

여기서 문장을 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물관은 개발 과정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그렇게 광고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광고 문구는 회사의 주장이고, 군에 실제로 무엇을 얼마나 납품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순서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흔히 군에 납품하던 장비가 나중에 일반 판매로 넘어갔다고 말하지만, 1938년에는 이미 고급 선글라스를 알리는 광고에 조종사가 등장합니다. 조종사는 제품을 쓰는 사람이면서, 제품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시작한 해는 왜 자료마다 다를까

언제 시작됐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여럿입니다. 바슈롬 연표와 스미스소니언은 1936년입니다. 1999년에 이 브랜드를 인수한 룩소티카(Luxottica)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낸 2011 회계연도 연차보고서는 1937년에 에비에이터 모델로 처음 등장했다고 적습니다. 1993년 상표 소송 판결(Bausch & Lomb v. Nevitt Sales)은 1930년대 후반부터라고 넓게 씁니다.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가려낼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연표는 군 조종사용 고글을, 박물관은 고급 선글라스와 안경을, 보고서는 에비에이터 모델을 말하고 있어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물건일수록 ‘언제’라는 질문에는 ‘무엇을 기준으로’라는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조종사 안경을 말한 회사는 하나가 아니었다

미국 안경 회사 American Optical의 소개 글은 1935년에 미군과 협력해 D-1을 내놓았고, 이것이 조종사 전용으로 설계된 첫 선글라스였다고 설명합니다. 넓게 가리고 주변 눈부심을 줄이기 위한 눈물방울 렌즈도 함께 언급합니다.

바슈롬 연표보다 한 해 앞선 연도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회사가 자기 역사를 소개한 글이어서, 두 회사의 문장을 나란히 놓는다고 ‘최초’가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1930년대 중반 미국에서 조종사의 눈부심이 한 회사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읽을 수 있습니다.

옛 항공기 조종석에서 바라본 강한 햇빛을 표현한 장면
옛 항공기 조종석에서 바라본 강한 햇빛을 표현한 장면 · AI 생성 이미지

전쟁이 남긴 장면

로체스터 공공도서관이 펴내는 Rochester History 2004년 겨울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바슈롬의 Ray-Ban 선글라스 생산량 전부가 육군과 해군 조달 부서로 갔다고 적습니다. 높은 고도를 나는 조종사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같은 글에는 장면 하나가 더 나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Ray-Ban이 망가져 새것을 특급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전해진다(reportedly)’는 말을 붙였고, 주석은 바슈롬 소책자와 1945년 지역 신문을 가리킵니다. 재미있는 일화이지만 그 정도의 무게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업사 사전 International Directory of Company Histories도 미 육군 항공대 조종사와 맥아더의 사용을 전쟁기 서술에 적었습니다. 이후 바슈롬은 1999년 6월 Ray-Ban을 포함한 선글라스 사업을 룩소티카에 넘겼다고 공시했습니다.

활주로에서 거리까지

바슈롬이 1930년대 중후반 Ray-Ban이라는 이름으로 조종사를 앞세웠다는 점은 회사와 박물관 기록이 함께 보여 줍니다. 전쟁 중 생산분이 군 조달로 갔다는 서술은 로체스터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조종사라는 이름이 아직 따라다니는 데에는 장비로서의 쓰임과 광고의 말이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이 글의 이미지는 당시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생성 이미지이며 실제 기록 사진이 아닙니다.

다음에 이 모양의 선글라스를 보게 되면 렌즈가 아래쪽으로 얼마나 내려오는지 한 번 살펴보세요. 패션으로 남은 곡선이지만, 제조사가 설명하는 출발점은 멋이 아니라 눈부심입니다.